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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북) 솔숲길 따라 산책길 나서보는 청도 운문사와 대적사

슬픔 없는세상 2010. 3. 6. 05:42

경북 청도의 운문사 대웅보전 천장에는 줄 하나에 의지한 인형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악착동자'라 불리는 인형이다.

악착동자가 악착같이 매달린 용모양의 긴 나무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이다.

북대암 암자에서 내려다본 운문사의 모습^^

 

 

운문사 대웅보전 천장에 걸려있는 악착동자

 

 

 

↑ 이슬비 내리는 아침, 청도 운문사 입구 솔숲엔 솔향이 낮고 그윽하게 깔렸다

 

 

용비어천도와 거북등이 새겨진 대적사 극락전

 

◇신라 때 세워진 청도 운문사의 말사인 북대암에 봄이 찾아왔다. 하늘 향해 치솟은 암벽 아래 운문사 주위를 나는 새들은 청아한 소리를 빚어내고, 계곡물은 맑은 소리를 내며 저만치 달아난다.

 

 

◇운문사 입구는 삼림욕장 만큼이나 공기가 맑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중생을 태워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피안의 세계로 이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 이들이

그리할 수 없기에 생전에 덕을 쌓고 부처에 의지하면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갈 수 있다고 길을 열어놓았다. 그 피안의 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악착같이 매달린 동자의 모습이다. 반야용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줄이라도 매달고 가고 싶어 하는

애처로운 중생의 모습이다. 바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일 것이다.

악착동자가 매달린 반야용선의 이야기는 청도의 또 다른 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청도군 화양읍 송금리에 있는 작은 사찰 대적사다.

이름처럼 적적하리만큼 조용한 사찰이다. 대적사는 신라 헌강왕 2년(876년) 보조선사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이다.

그간 많은 전란을 겪으며 부서지고 다시 짓고를 반복해온 곳이다. 이곳엔 보물로 지정된 극락전이 있다.

청도군 문화해설사 김선희씨는 극락전이 보물이 된 이유를 그 기단 때문이라고 했다. 신라 때 큰 사찰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란다.

여러 조각이 붙어 하나의 기단을 이루고 있다. 중간에 여러 번 개ㆍ보수가 있었는지 각 돌조각 마다 색이 조금씩 달랐고 이음새도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이 기단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돌계단 오른쪽 옆에 장식된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조각이다. 김씨는 "기단에 용비어천도가

새겨진 것은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했다. 기단 전체엔 H자형으로 굵은 기둥 같은 게 툭 불거지게 새겨져 있다.

그 기둥 중 하나에 어미거북과 새끼거북, 절의 문양에서 쉽게 볼 수 없던 게 한 마리가 돋을새김 돼있다.

돌계단 왼쪽에 장식된 거친 파도 등으로 볼 때 이 극락전 기단은 거친 바다를 가로 지르는 반야용선을 의미한다.

H자형 굵은 기둥은 배의 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기둥에 새겨진 거북의 모양이 이채롭다. 거북의 네 발이 있는 힘을 다해

기둥의 모서리를 꽉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악착동자가 줄에 매달린 것처럼 반야용선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악착이 느껴진다.

기단 위의 목조 건물은 18세기에 지어졌다. 이곳의 내부 장식도 운문사 대웅보전 만큼이나 재미있다. 작지만 화려한 닫집이 인상적.

닫집 앞에는 천장을 뚫고 내려온 용 두 마리가 조각돼 있다. 또 용 바로 앞에는 천상의 세계를 상징하는 구름 한 조각이 천장에 줄을

매달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260여 명의 학인 스님들이 공부하는 4년제 승가대학, 속세로 따지면 여승들만을 위한 여자대학인 셈이다.

신라 진흥왕 21년(560년) 한 신승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지며 진평왕 30년(608년) 원광국사에 의해 중창됐다. 원광국사는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 5계를 일러 준 인물이다. 운문사는 고려 때 일연이 머무르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1958년 불교정화

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자리잡았다. 87년 승가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현재 1~4학년 학인 스님과 강사 스님들이 연구하는

수행도량이다. 학인 스님들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청규를 실천한다.

운문사 입구에선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진 솔숲을 지난다. 지난해 솔 숲 사이로 산책로가 만들어졌다.

약 600m 되는 길이의 평화로운 솔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참선을 한 듯 차분해진다.

운문사에는 비로전(보물 제835호), 삼층석탑(678호) 등 보물이 7개 있고, 만세루 옆의 땅으로 길게 가지를 뻗친 500년 넘은 처진

소나무가 천연기념물 180호로 지정돼 있다. 온몸으로 기도를 올리는 오체투지를 하는 양, 모든 가지가 땅으로 치내려 마치 엎드려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이 나무는 매해 음력 삼월삼짇날 막걸리 12말을 받아 먹고 기운을 보충한다.

운문사 대웅보전 뒤로 올려다 보이는 암자는 북대암이다. 북대암 마당은 운문사를 가장 잘 내려다 보는 전망대다.

초록의 품 안, 산봉우리를 꽃잎 삼아 화판의 중심에 여유롭게 자리한 운문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적사 바로 아래엔 청도에서 새롭게 각광받는 관광지인 와인터널이 있다. 폐 철도 터널을 훌륭한 와인숙성고로 바꾼 곳이다.

일제가 1904년 완공한 경부선 철로의 터널이다. 1937년 마을 아래로 반듯한 새 철로가 놓이면서 버려졌던 곳이다.

무용지물이던 이 터널이 훌륭한 와인창고로 다시 태어났다.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감와인을 생산하고 있는'청도감와인'이 와인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내부 온도가 사시사철 15도를 유지하는 터널은 천혜의 와인셀러다. 시멘트 콘크리트가 아닌 황토벽돌로 아치형 천장을

삼은 터널의 내부가 운치 있다. 터널 입구에는 감와인 카페가 운영되고 있다.

 

 

 

청도의 가볼만한 곳

 

운문사^^

 

매표소 옆 석주(石柱·돌기둥)에 호거산 운문사(虎踞山 雲門寺)가 표시돼 있다. 호랑이가 머무는 산에 운문사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 광저우의 호거산 운문사에서 그 표현을 빌려온 듯싶다. 운문사는 동양 최대의 비구니 사찰. 300명 가까운 비구니가

공부한다. 4년제 승가대학이다. "속세로 따지면 이화여대나 숙명여대쯤 될 것"이라는 설명이 와닿는다.

그렇다면 다른 3대 비구니 사찰인 언양 석남사와 공주 동학사와 비유될 여대는 어디일까.

다른 사찰과 달리 운문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대신 솔 향기 짙은 푸른 소나무가 바깥 세상에서 온 이들을 맞이한다.

소나무들은 꽤 키가 크다. 줄을 맞춘 듯 정렬돼 있다.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의 머리만큼이나 정갈하다. 산문을 들어서는 이의 마음도

정결해진다. 운문사가 창건된 때는 신라 진흥왕 21년(560년) 시절. 진평왕 30년(608년)에 원광 국사가 중창했다.

국사 시간이면 등장했던 세속5계를 화랑에게 알려준 국사다. 신라 시절 젊은 낭도들의 터전이었던 이곳이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자리 잡은 때는 1958년. 승가대학은 1987년에 들어섰다.

 

사찰까지는 평지와 같은 경사도다. 소나무 숲을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화랑이 애국의 마음을 다졌고, 세상을 초탈한 비구니들이 공부하는

곳이어서인가. 느낌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경내에 들어서자 500년 노송이 반긴다. 경내 한쪽을 가득 메울 정도로 가지가 늘어진 모습에 '처진 소나무'라는 표현이 제격이다. 전체적으로는 모습이 연꽃을 닮았다. 겸허하면서 자비로운 모습이 따로 없다. 노송은 1년에 한번 술에 취한다. 해마다 삼월 삼짇날을 전후해 막걸리 열두 말을 부어준다. 영양 보충이지만, 당국 입장에서는 주류 간접세 수입원인 셈이다.

 

 

 

북대암^^

 

운문사에 비해서는 꽤 가파르다. 북대암은 암벽 기슭에 자리했다. 북대암 마당에서 운문사 전경을 바라본다. 운문사에서는 몰랐는데,

이곳에서 보니 동양 최대의 비구니 사찰도 그리 크지 않다. 의미를 찾고자 여기저기 살펴본다. 밋밋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숲 속에서도 겨울이 밀려간 듯하다. 잔설마저 몰아낸 산과, 산이 만들어낸 공간에 자리한 운문사에 초록 빛깔이 번져간다. 북대암

입구에서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북대암 마당의 높은 나뭇가지 사이에서는 까치 소리가 들린다. 맑은 교향곡이 따로 없다.

 

 

 

 임당리 김씨고택^^

 

금천면 임당리의 김씨고택은 내시가 살았던 집이다. 그래서 '내시 고택'으로도 불린다. 그 사연이 있다. 내시들로만 가계는 16대까지

이어졌다. 1592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거세된 자들'에게 가계와 가문이 있었다니, 믿기 어려울 수 있다. 답은 바로 입양이다.

내시 집안에 입양시키는 친부모가 많지 않을 듯싶지만, 갖가지 사연으로 입양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가계의 마지막 내시였던

이는 통정대부 정3품 벼슬을 지낸 김일준(1863∼1945). 그가 낙향해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어떻게 알려지게 됐을까. 가계의 흐름을 알려주는 가세도(家世圖)를 통해서다. 가세도가 발견된 때는 1980년. 가계를 알려주는

직함과 이름, 산소의 위치가 기록돼 있었다. 족보가 보통 세로의 종적인 기록이지만, 이 가세도는 횡적인 기록이 다수였다.

가로는 A4 4장을 이어놓은 분량이었지만, 세로는 7㎝밖에 안 됐다. 입양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가세도는 입향시조가 정착해

15대까지 양자를 들여 이어온 내력이 담겨 있다. 김일준은 16대이며, 양아들인 17대에 이르러서는 갑오경장으로 내시제가 없어졌다. 18대부터는 정상적인 부자관계로 가계를 잇고 있다.

 

 

청도소싸움축제의 현장^^

 

추억의 언저리를 넘나들다가 찾은 곳은 이서면 가금동. 17일부터 닷새 동안 이어지는 '청도소싸움축제'를 위해 체력 훈련 중인 소를 찾았다. '아침에 만난 세상'은 한참 몸을 만들고 있었다. 줄여 '아만세'라 불리는 이 소의 몸무게는 660㎏이 넘는다. 아만세는 17일 이전까지 660㎏ 이하로 몸무게를 줄여야 한다. 그가 출전하는 체급 '특병'의 한계 체중을 맞춰야 해서다. 소싸움은 사람의 격투기처럼 갑·을·병(특갑·특을·특병 포함)체급별로 치른다. 아만세는 2006년 의령소싸움대회에서 3위로 이름을 알린 뒤, 청도소싸움축제에서는 2007년 4위, 2008년 1위에 올랐다. 소 100두를 키우고 있는 우주(牛主) 예병권(49) 사장에게 아만세는 보배다. 그간 벌어들인

수입은 1000만원이 넘는다. 강둑을 달리고, 차에 태우면서 규칙적으로 강훈을 시킨 덕택이다. 그보다는 사람도 못 먹는 한약을 수시로

먹으면서 사랑을 받은 덕택인지 모른다. 소나 사람이나 잘 먹고 즐겨야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법이다. 푸른 밭두렁을 거니는 아만세를

보면서, 예 사장이 축제가 끝날 때 "아, 만세" 하기를 기대해 본다.

 

 

출처 : 싱글 클럽(해외,국내여행/친목/만남)
글쓴이 : 은지 (안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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